己酉(一四二九)生 생원(生員)을 지내셨다. 어려서부터 중부(仲父) 건곡공(虔谷公)에게서 학문을 배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전한 성리학(性理學)의 깊은 뜻을 연구하셨다. 도신(道臣)이 여러 차례 조정에 추천하여 외대도사(外臺都事)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천안군수(天安郡守)를 제수하자 마지못하여 나아가 1년 동안 다스려 치적을 나타내고는 곧 고향으로 돌아오셨는데 돌아올 때의 짐은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책 상자뿐이었다. 만년에 나라에 경사(慶事)가 있음을 인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벼슬의 品階를 올리는 일)하였다. 저서(著書)에 『경의집설(經義集說)』 및 『사서소변(四書小辨)』이 있는데 우복당(愚伏堂) 정경세(鄭經世)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우리 동방(東方) 성리학의 정통(正統) 연원(淵源)은 조선생에게 있다」고 하셨다. 墓순창군 금동면(今洞面) 벌고동(筏古洞) 안산(案山) 수월치(水越峙) 갑좌(甲坐)인데 밀성(密城) 박인(朴寅)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配숙부인(淑夫人) 南陽洪氏(남양홍씨) 墓부좌(?超埰?) 父좌찬성(左贊成) 홍의식(洪義式)